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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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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바오로 2세는 1464년부터 1471년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베네치아 출신으로 추기경을 거쳐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재위 기간 동안 교황청 개혁을 시도하고 인쇄술을 도입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고 예술품을 수집했으며, 보헤미아 국왕 게오르그 폰 포디브라트와 갈등을 겪었다. 바오로 2세는 로마 아카데미를 탄압하고 유대인 차별 정책을 펼치기도 했으며, 1471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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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미노 다 피에솔레 - 바오로 베네투스 PP. II
바오로 2세의 현대 흉상, 현재 팔라초 베네치아에 있음
이름바오로 2세
본명피에트로 바르보
출생일1417년 2월 23일
출생지베네치아 공화국 베네치아
사망일1471년 7월 26일
사망지교황령 로마
재임 시작1464년 8월 30일
재임 종료1471년 7월 26일
선임자비오 2세
후임자식스토 4세
문장
경력
이전 직책산타 마리아 누오바 성당의 추기경-부제 (1440–1451)
체르비아 교구의 교황 대리 (1440–1451)
성 베드로 대성전의 수석 사제 (1445–?)
추기경 성 колле기움의 Camerlengo (1445–1446; 1460–1461)
비첸차 교구의 주교 (1451–1464)
산 마르코 성당, 로마의 추기경-사제 (1451–1464)
파도바 교구의 주교 (1459–1460)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수도원장 (1465–1471)
추기경 임명1440년 7월 1일
추기경 임명자에우제니오 4세
종교
소속 교회가톨릭 교회

2. 생애 초기

교황 바오로 2세의 속명은 Pietro Barbo|피에트로 바르보ita로, 베네치아의 유서 깊은 귀족 바르보 가문 출신이다.[2] 그의 어머니 폴릭세나 콘둘머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재위 1431–1447)의 여동생이었다.[2] 본래 상인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았으나, 외삼촌인 에우제니오 4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그의 영향으로 사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26][6]

야심찬 젊은 사제였던 그는 외삼촌의 영향으로 성직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볼로냐의 대사제, 체르비아 및 비첸차의 주교를 거쳐 1440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6] 그는 관대한 성품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자신이 교황이 되면 추기경들에게 여름 별장을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26][4] 1441년에는 산타 마리아 인 실비스 수도원의 아빠스(속가 수도원장)로 임명되었고,[2] 1445년에는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의 뒤를 이어 성 베드로 대성전의 대사제가 되었다.[2] 에우제니오 4세부터 교황 칼릭스투스 3세 시대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교황 비오 2세 치하에서는 그 영향력이 다소 줄어들었다.[6] 그는 또한 화려한 교회 예복을 선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

2. 1. 배경

피에트로 바르보(Pietro Barbo)는 베네치아의 귀족 바르보 가문 출신으로, 니콜로 바르보(Niccolo Barbo)와 교황 에우제니오 4세(재위 1431–1447)의 여동생인 폴릭세나 콘둘머(Polixena Condulmer) 사이에서 태어났다.[2] 본래 상인으로 훈련받았으나, 삼촌인 에우제니오 4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사제의 길을 걷게 되었다.[6]

그의 성직 경력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는 볼로냐의 대사제, 체르비아 및 비첸차의 주교를 거쳐 1440년 삼촌 교황 에우제니오 4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6] 로마에 머무는 동안 비첸차 교구는 그의 형제인 파올로 바르보가 관리했다.[3] 바르보는 관대한 성품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면 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각 추기경에게 별장을 마련해주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6][4]

1441년에는 산타 마리아 인 실비스 수도원의 속가 수도원장(Abbot commendatory)이 되었고,[2] 1445년에는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의 뒤를 이어 성 베드로 대성전의 대사제가 되었다.[2][6] 그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 교황 니콜라오 5세, 교황 칼릭스투스 3세 치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교황 비오 2세 치하에서는 그 영향력이 감소했다.[6] 또한 화려한 교회 예복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6]

2. 2. 성직 입문

피에트로 바르보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외가 쪽 조카로, 베네치아의 귀족 바르보 가문 출신이다.[2] 그의 아버지는 니콜로 바르보이며, 어머니 폴릭세나 콘둘머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여동생이었다.[2] 본래 상인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았으나, 삼촌이 교황으로 선출되자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26][6]

야심찬 젊은 사제였던 그는 빠르게 승진하여 볼로냐의 대사제, 체르비아 및 비첸차의 주교를 거쳐 1440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6] 그가 로마에 있는 동안 비첸차 교구는 그의 형제인 파올로 바르보가 관리했다.[3] 바르보는 관대한 성품으로 인기를 누렸으며,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면 추기경들에게 더위를 피할 호화 별장을 각각 제공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26][4]

1441년에는 산타 마리아 인 실비스 수도원의 아빠스(속가 수도원장)로 임명되었고,[2] 1445년에는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의 뒤를 이어 성 베드로 대성전의 대사제가 되었다.[2] 그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 교황 니콜라오 5세, 교황 칼릭스투스 3세 치하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교황 비오 2세 시기에는 그 영향력이 감소했다.[6] 또한 화려한 교회 의복을 즐기는 경향이 있었다.[6]

3. 교황 선출

피에트로 바르보는 교황 비오 2세가 선종한 후 소집된 1464년 교황 선거에서 1464년 8월 30일, 첫 투표만에 참석한 19명의 추기경 중 14표를 얻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5] 그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조카였으며, 삼촌이 교황이 된 것을 계기로 성직자의 길을 걸어 1440년에 추기경이 되었다. 그의 선출 배경에는 전임 교황 피우스 2세의 정책에 대한 일부 추기경들의 불만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

콘클라베가 열리기 전날 밤, 루도비코 트레비산 추기경을 제외한 추기경들은 선출될 교황이 지켜야 할 몇 가지 사항에 대해 서약했다. 주요 내용은 ▲전임 교황 때보다 추기경들에게 더 큰 권한 보장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지속 ▲교황의 이동 제한(로마 밖으로 나갈 때는 추기경 다수의 동의, 이탈리아 밖으로 나갈 때는 추기경 전체의 동의 필요) ▲추기경단 수를 24명으로 제한하고 교황의 친족 중 단 한 명만 추기경으로 서임 ▲새로운 추기경을 서임할 때 사전에 추기경단의 동의 획득 등이었다.[27] 또한 3년 안에 공의회를 소집하겠다는 약속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교황으로 선출된 피에트로 바르보는 교황명을 바오로 2세로 정한 뒤, 선출 전에 했던 약속들을 자신의 재량에 따라 수정하거나 취소했다. 이는 약속을 그대로 지킬 경우, 교회 문제에 대한 교황의 독자적인 권위는 물론 교황령 내에서의 절대 군주제까지 약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28][7] 이 결정으로 바오로 2세는 추기경단의 신뢰를 잃게 되었다. 교황 대관식 직후부터 그는 외부와의 접촉을 크게 줄였고, 교황을 만나기는 매우 어려워졌다. 교황 알현은 오직 밤에만 허용되었으며, 심지어 가까운 친구들조차 그를 만나기 위해 2주일을 기다려야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의심이 많은 성격으로도 알려졌다.

로마의 베네치아 궁전에 있는 교황 바오로 2세의 흉상


바오로 2세는 개인적인 취향과 외모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는 공식 석상에서 볼연지를 바른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으며,[29][4]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에메랄드, 토파즈, 큰 진주 등 온갖 종류의 값비싼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교황관을 특별히 제작하여 착용했다.[29][4] 이러한 외모 때문에 ‘잘생기다’는 뜻을 가진 포르모수스 교황의 이름을 따서 ‘포르모소 2세’(Formosus II)라는 교황명을 사용하려 했으나, 추기경들의 만류로 포기했다는 일화가 있다.[30][8] 또한 그가 베네치아 출신이고 산 마르코 추기경이었기 때문에, 베네치아의 상징과 같은 '마르쿠스'라는 이름을 교황명으로 쓰려다 주변의 설득으로 단념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9] 그는 로마에 있는 산 마르코 궁전(오늘날의 베네치아 궁전)을 1455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466년에 완공하였고, 이곳을 자신의 주요 거처로 삼았다. 또한 많은 예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여 궁전을 장식했다.[31][10]

4. 재위 기간

교황 비오 2세가 선종한 후 열린 콘클라베에서, 피에트로 바르보는 첫 투표에서 참석 추기경 19명 중 14명의 지지를 받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선출 전날 밤, 그는 다른 추기경들과 함께 후임 교황의 권한을 일부 제한하고 추기경단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의 서약에 서명했다. 서약에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지속, 교황의 이동 제한, 추기경단 규모 및 교황 친족의 추기경 서임 제한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27]

그러나 교황 바오로 2세로 즉위한 후, 그는 교황의 독자적인 권위와 교황령 내에서의 통치권 약화를 우려하여 선출 전의 약속들을 상당 부분 수정하거나 파기했다.[28] 이로 인해 추기경들과의 신뢰 관계는 깨졌으며, 교황은 점차 고립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알현을 주로 밤에만 허락하고 측근들조차 만나기 어렵게 만드는 등 비밀주의적인 모습을 보였고, 의심이 많은 성격으로 알려졌다.[28]

바오로 2세는 외적인 권위를 중시하여 공식 석상에 볼연지를 바르고 나타나거나,[29]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등 각종 보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교황관을 착용하기도 했다.[29] 이러한 모습 때문에 '잘생기다'는 의미의 '포르모소 2세'(Formosus II)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30] 그는 로마의 산 마르코 궁전(오늘날의 베네치아 궁전)을 1466년에 완공하여 주요 거처로 삼았으며, 이곳에 많은 예술 작품을 수집하여 전시했다.[31]

재위 기간 동안 바오로 2세는 교황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추기경 서임 시 추기경단의 동의를 구하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비밀리에 자신에게 협조적인 인물들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여 비판을 받았다.[32][33] 또한 1466년에는 교황청 문서를 작성하던 초록관직을 폐지하는 등 교황청 조직을 개편하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인문주의 성향의 학자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으며, 이는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를 비롯한 로마 학술원 회원들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34] (자세한 내용은 #교황청 개혁 시도와 갈등, #로마 학술원 탄압 참조)

대외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려 했으나, 십자군 원정의 주요 협력 대상이었던 보헤미아의 왕 이르지와의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자세한 내용은 #보헤미아 왕 이르지와의 갈등 참조) 한편, 인문주의 학문에는 비판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령 내 인쇄술 도입을 지원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인쇄술 도입 참조)

바오로 2세의 재위 기간은 교황 권력 강화 시도와 그에 따른 내부 갈등, 사치스러운 생활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특히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와 같은 동시대 인물들의 비판적인 기록은 그의 사후 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34] (자세한 내용은 #사치스러운 생활과 예술품 수집 참조)

4. 1. 교황청 개혁 시도와 갈등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피에트로 바르보는 콘클라베 전날 밤 루도비코 트레비산 추기경을 제외한 다른 추기경들과 함께 후임 교황의 권한을 제한하고 추기경단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의 서약에 서명했다. 이 서약에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지속, 교황의 이동 제한, 추기경단 규모 24명 제한, 교황 친족 중 단 한 명만 추기경 서임 허용, 신규 추기경 서임 시 추기경단 동의 요구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27]

그러나 교황 바오로 2세로 선출된 직후, 그는 교황의 독자적 권위와 교황령 내에서의 전제 정치가 약화될 것을 우려하여 이 서약을 대폭 수정하거나 취소했다.[28] 이로 인해 추기경들과의 신뢰 관계는 깨졌고, 교황은 점차 고립되어 알현조차 어렵게 되었다. 그는 의심이 많아졌고, 교황과의 만남은 주로 밤에만 이루어졌으며 가까운 이들조차 만나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만 했다.[28]

바오로 2세는 추기경 서임에 관한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자신에게 협조적인 추기경 수를 늘리고자 했으며, 추기경단의 사전 동의 없이 비밀리에 추기경을 서임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1464년에서 1465년 겨울, 비밀리에 두 명의 추기경을 서임했으나 공식 발표 전에 사망했다. 1467년 9월 18일에는 8명을 추기경으로 서임했는데, 이 중 다수는 유럽 군주들(키프로스의 자크 2세, 잉글랜드에드워드 4세, 프랑스루이 11세, 헝가리의 마티아스 코르비누스, 나폴리페르디난도 1세)의 추천을 받은 인물이었고, 나머지는 프란치스코회 관리자, 오랜 스승, 조카였다.[32][11] 1468년에는 조카 두 명을 추가로 추기경에 서임했으며,[33][12] 이후에도 비밀 서임을 계속하여 1471년 초에는 유언을 통해서만 공개할 네 명의 추기경을 미리 정해두기도 했다. 이러한 비밀주의와 약속 파기는 추기경단과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교황청 개혁 시도 역시 갈등을 유발했다. 1466년, 바오로 2세는 교황청 문서를 작성하던 초록관(Abbreviator)직을 폐지하여 관료주의를 없애려 했으나, 이 조치는 해당 직책에 종사하던 인문주의 성향의 수사학자 및 시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34] 이 사건은 이후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과 교황 사이의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로마 학술원 탄압 참조)

한편, 오스만 제국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갈등이 발생했다. 원정의 주력이 되어야 할 보헤미아의 왕 이르지(Jiří z Poděbrad)가 얀 후스를 이단으로 규정한 바젤 공의회의 결정을 따르기를 주저하자, 교황은 그를 이단 혐의로 파문하고 신하들의 충성 맹세를 해제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했다. 이후 이르지의 외교적 노력으로 두 사람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으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교황이 선종했다.

4. 1. 1. 로마 학술원 탄압

1466년 교황 바오로 2세는 교황청 문서를 작성하던 초록관(Abbreviator)직을 폐지하려 했는데, 이는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수사학자나 시인들이 주로 맡던 자리였기에 큰 반발을 샀다.[13] 바오로 2세는 평소 인문주의자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이러한 조치는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었다.[34]

초록관이자 로마 학술원 회원이기도 했던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Bartolomeo Platina)는 교황청 내 자신의 직책이 축소되자,[13] 1464년 겨울, 교황에게 이를 철회하라는 무례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가 투옥되었으나 4개월 만에 풀려났다.[13][34]

이후 1468년 2월, 로마에서 정치적 음모가 감지되자 바오로 2세는 플라티나를 비롯한 로마 학술원 회원 다수를 불경죄, 부도덕, 교황 암살 음모 혐의로 다시 체포했다.[13] 이때 플라티나와 함께 교황에게 반기를 든 필리포 부오나코르시 등도 투옥되었다.[34] 체포된 이들은 고문을 받았으며,[13] 플라티나는 이단이라는 죄명까지 쓰게 되었다.[34] 플라티나는 1469년 7월 7일에야 석방되었지만,[14] 교황청에 다시 고용되지 못하자 복수를 다짐했다. 그는 이후 교황 식스토 4세의 제안으로 《교황들의 생애》(Vitae Pontificum, 1479년)를 저술하여 바오로 2세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34]

플라티나는 이 책에서 바오로 2세를 잔인하고 학문을 싫어하는 인물로 그렸으며, 교황 피우스 2세가 바오로 2세(본명 바르보)를 "가장 경건한 마리아"라는 뜻의 Maria Pietissima|마리아 피에티시마la라고 불렀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이는 바오로 2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눈물로 호소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15] 일부 역사가들은 이 별명이 남성성 부족, 나아가 동성애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16] 플라티나의 저술은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34] 바오로 2세에 대한 후대의 평가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비판적인 연구를 통해 플라티나의 묘사가 왜곡되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러한 바오로 2세의 탄압은 로마의 지성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피터 파트너(Peter Partner)는 이 사건이 문필가들에게 로마에서 문화적 순응이 강요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했다.[17] 실제로 이 탄압 이후 로마 학술원은 이전보다 신학에 더 치중하는 등 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었다.[34][17] 플라티나와 함께 투옥되었던 필리포 부오나코르시는 결국 폴란드로 망명하였다.[34]

4. 2. 보헤미아 왕 이르지와의 갈등

교황 바오로 2세는 보헤미아의 게오르크(게오르그 폰 포디브라트)가 후스파를 옹호하며 바젤 공의회의 관례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그를 보헤미아의 정당한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465년 8월, 바오로 2세는 게오르크 국왕에게 로마 법정에 출두할 것을 소환했다.[35][36][1][18] 게오르크 국왕이 이에 응하지 않자, 바오로 2세는 보헤미아 내 반란 세력과 동맹을 맺고, 게오르크 국왕의 신하들이 그에게 했던 충성 맹세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선언했다.[35][36][1][18]

1466년 12월, 바오로 2세는 게오르크 국왕을 파문하고 폐위한다는 교서를 발표했다.[35][36][1][18] 이에 게오르크 국왕의 옹호자였던 하임베르크의 그레고리오는 바오로 2세가 부도덕하다고 비난하며 맞섰으나, 그 역시 파문당했다.[35][36][1][18]

이후 게오르크 국왕은 바오로 2세와 화해를 시도했으나,[35][36] 1471년 7월 26일 바오로 2세가 갑작스럽게 심근 경색(심장마비)으로 선종하면서 무산되었다.[35][36][1][18]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멜론을 너무 많이 먹어 생긴 급성 소화불량이라는 설과,[35][36][1][18] 교황의 비평가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남색을 하던 중에 사망했다는 설 등 여러 주장이 전해진다.[19] 바오로 2세의 죽음은 같은 해 3월에 이미 게오르크 국왕이 사망한 상황과 맞물려 중앙 유럽에 권력 공백 상태를 야기했다.[1]

4. 3. 인쇄술 도입

교황 바오로 2세는 인문주의적 학문이나 교육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교황령에 인쇄술을 도입하는 것은 승인하고 감독하였다. 그 결과, 1464년 아르놀트 판나르츠와 콘라드 스웨인헤임에 의해 수비아코에서 처음으로 인쇄술이 시작되었으며, 3년 뒤인 1467년에는 로마에도 도입되었다.

인쇄술의 도입으로 책을 비롯한 문서들의 출판량이 이전의 필사본 시대보다 훨씬 증가하였고, 가격 또한 저렴해졌다. 이는 더 많은 사람, 특히 점차 늘어나던 평신도들까지 고등 교육에 필요한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만들었다. 출판물을 찾는 수요가 늘면서 전문 인쇄인을 양성하는 교육도 이루어졌다. 다만, 이 시기 인쇄소에서 만들어진 출판물들은 사전에 교회의 심의를 받아야 했으며, 바오로 2세 재위 기간 동안 교황령에서 생산된 책들은 주로 라틴 고전 문학이나 교회 문헌에 한정되었다.

4. 4. 사치스러운 생활과 예술품 수집

바오로 2세는 권위를 내세우는 것을 좋아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으며,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37][22]

그가 선종한 후, 후임자인 교황 식스토 4세와 선발된 추기경들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비용으로 비축해 둔 보물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30만 두카트 상당의 진주로 장식된 은 조개상 54개, 역시 30만 두카트 상당의 보석과 금괴, 그리고 7천 두카트 가치의 훌륭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었다. 이 다이아몬드는 교황에게 선금을 지불했던 에스투트빌 추기경에게 보내졌으나, 이 돈은 즉시 회수되지 않았다.[23][38] 이 밖에도 바오로 2세는 800여 개나 되는 보석을 수집하기도 하였다.[24]

5. 죽음

교황 바오로 2세의 무덤


바오로 2세는 1471년 7월 26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선종했다.[35][36][1][18] 당시 그는 후스파를 옹호하고 바젤 공의회의 관례를 지지한 보헤미아의 게오르크(게오르크 포데브라디 왕)와 대립하고 있었다. 바오로 2세는 1466년 12월 게오르크 왕을 파문하고 폐위 선고까지 내렸으나, 게오르크 왕이 화해를 시도하던 중에 선종한 것이다.

바오로 2세의 정확한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전해진다. 멜론을 지나치게 많이 먹어 급성 소화 불량으로 쓰러졌다는 주장이 있으며,[35][36][1][18] 교황에게 비판적이었던 이들 사이에서는 그가 시종남색을 하던 중에 사망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9]

바오로 2세의 죽음은 같은 해 3월에 사망한 게오르크 왕의 죽음과 맞물려 중앙 유럽에 권력 공백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6. 평가와 영향

바오로 2세는 인문주의 학문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교황령에 인쇄술 도입을 승인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1464년 아르놀트 판나르츠와 콘라드 스웨인헤임에 의해 수비아코에 처음으로 인쇄술이 도입되었고, 1467년에는 로마에도 도입되었다. 이로 인해 서적과 문서의 출판량이 이전 필사본 시대보다 훨씬 증가하고 가격도 저렴해져,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과 교육 자료가 보급될 수 있었다. 다만, 이 시기 출판물은 교회의 사전 심의를 거쳐야 했으며, 주로 라틴 고전 문학이나 교회 관련 문서에 국한되었다.

동시대의 연대기 작가 스테파노 인페수라는 공화주의적이고 반교황적인 성향 때문에 그의 기록은 편향되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바오로 2세는 인문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대중 오락 제공에는 힘썼다. 1466년, 바오로 2세는 로마의 주요 거리였던 비아 라타(훗날 비아 델 코르소로 개명)에서 카니발의 일환으로 경마 경기를 개최하도록 승인했으며, 이는 이후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20]

한편, 바오로 2세는 권위를 과시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는 비판을 받는다.[37][22] 그는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데 많은 비용을 투자했으며, 그의 사후 식스투스 4세와 추기경들이 조사한 결과 막대한 양의 보물이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30만 두카트 상당의 진주로 장식된 은 조개 54개, 또 다른 30만 두카트 가치의 보석과 금, 그리고 7천 두카트 상당의 다이아몬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약 800여 개의 보석을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다.[38][23][24]

교황청 운영과 관련하여, 바오로 2세는 즉위 초기에 친족 등용주의 척결과 도덕성 향상, 공의회 개최 및 오스만 제국 공격 등을 공약했으나, 이후 스스로 이를 철회하여 신뢰를 잃었다. 1466년에는 교황청 직원, 특히 교황 문서 작성 부서 인력을 대거 감축했는데, 이는 수입원을 잃게 된 많은 문필가들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이 과정에서 플라티나(바르톨로메오 사키)는 교황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가 투옥되었고, 석방 후에는 교황 암살 음모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플라티나는 훗날 자신의 저서 『교황지』(Liber de vita Christi ac omnium pontificum)에서 바오로 2세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국가 원수로서 바오로 2세는 이탈리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5] 다만 교황령 내에서는 1465년(또는 1466년) 반교황적 태도를 보이던 안귈라라 가문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외교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 원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핵심 동맹이 되어야 할 보헤미아 왕 이르지와 갈등을 겪었다. 이르지가 얀 후스를 이단으로 규정한 바젤 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자, 교황은 그를 파문하고 신하들의 충성 맹세를 해제했다. 이후 이르지의 외교적 노력으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으나, 완전한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기 전에 바오로 2세가 선종했다.

6. 1. 유대인 정책

1466년 바오로 2세사순절의 특징인 경마가 당시 로마의 주요 거리였던 비아 라타(훗날 비아 델 코르소로 개명)에서 열리도록 허락했다. 이 행사에는 소년, 성인 남성, 노인과 더불어 유대인을 위한 경주도 포함되었으며, 각 그룹에게는 상이 수여되었다.[20]

그러나 이 축제는 당시 유럽 기독교인들의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 감정을 드러내는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공화주의자이자 반교황주의 성향을 가졌던 연대기 작가 스테파노 인페수라의 기록에 따르면, 바오로 2세는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는 명목으로 유대인들의 옷을 벗겨 알몸 상태로 거리를 달리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유대인들에게 공공장소에서 노란색 손수건을 착용하도록 지시하여 비유대인들과 구별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은 수 세기 후 홀로코스트 시기 나치가 유대인을 식별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과 유사성을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피의 복수와 같은 폭력적인 관습을 줄이고 유대인들이 공정한 대우를 받도록 노력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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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Pope Paul II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20-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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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웹사이트 Pope Paul II http://www.newadvent[...] 2020-05-15
[7] 문서 Pastor, vol. IV, p. 21
[8] 문서 Pastor vol 14, p. 16
[9] 문서 Pastor, vol. IV, pp. 13, 15
[10] 서적 The Conclave: A Sometimes Secret and Occasionally Bloody History of Papal Elections Gardners Books
[11] 웹사이트 The election of Pope Sixtus IV (1471): Background http://www.fiu.edu/~[...]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 201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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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웹사이트 La 'conguira' degli umanisti: Platina e Pomponio Leto https://web.archive.[...] castelsantangelo.com 201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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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서적 Le vite di Paolo II di Gaspare da Verona https://archive.org/[...] Coi Tipi dell'editore S. Lapi 1904
[19] 서적 The Deadly Sisterhood: A Story of Women, Power, and Intrigue in the Italian Renaissance, 1427–1527 HarperCollins
[20] 문서 Pastor vol. IV, p. 32
[21] 문서 Pastor vol. IV, p. 33
[22] 문서 Pastor vol. IV, p. 16
[23] 문서 A cardinal's report to the Duke of Milan's ambassador, related in Pastor vol. IV, p. 211.
[24] 서적 Money and Beauty: Bankers, Botticelli and the Bonfire of the Vanities Giunti
[25] 서적 The History of the Papacy
[26] 서적 A sudden terror: The plot to kill a renaissance pope Harvard
[27] 문서 Ref. Burkle-Young
[28] 문서 Offered by Pastor IV 1894:21.
[29] 서적 A sudden terror: The plot to kill a renaissance pope Harvard
[30] 문서 The chronicler N. della Tuccia says that for half a century no handsomer man had been seen in the Senate or the Church (Pastor IV 1894:16.
[31] 서적 The Conclave Norwich
[32] 웹인용 Francis A. Burkle-Young, "The election of Pope Sixtus IV (1471): Background" http://www.fiu.edu/~[...] Fiu.edu null
[33] 문서
[34] 서적 The Pope's Men: The Papal Civil Service in The Renaissance Clarendon Press
[35] 웹사이트 Paolo II in Enciclopedia dei Papi http://www.treccani.[...]
[36] 서적 Vita Pauli Secundi Pontificis Maximi http://books.google.[...] 1734
[37] 서적 #추정.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Pastor IV 1894
[38] 서적 Money and Beauty: Bankers, Boticelli and the Bonfire of the Vanities Giunti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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